장성한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유대교의 유일신의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인 복음을 전파하러 이스라엘 지역을 떠돌았다. 그런데 예수의 가르침은 당시 유대교의 신학자 들이었던 율법 학자들의 율법 이해와 충돌했다. 왜냐하면 예수는 형식 화 된 율 법 에 구애 받지 않고 행동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에 대한 이스라엘 민족의 판단은 인정과 거부의 양 극단으로 나뉘었다. 그러던 중 예수는 반대자 들 의 고소와 제자 중 한 명이었던 유다의 변 절로 잡혀갔고, 로마의 유대 지역 집 정 관인 본디오 빌라도 앞에 서게 되었다. 앞에서 말 했듯 이 시기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기에 치안 유지는 로마가 하고 있었다. 쉽게 비유하면 로마는 일본, 이스라엘은 식민지 조선, 본디오 빌라도는 이토 히로부미 정도 되겠다. 어 쨌 거나 빌라도 앞에 끌려온 예수는 풀려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유대 민족의 풍습 중에 과월절 이 있는데, 이날에는 죄수 한 명을 풀어주는 풍습이 있었다. 고소가 접수되어서 잡아오기는 했지만, 빌라도는 예수의 남다른 포스를 보고 처형하기가 껄끄러웠다. 중동 지역에 살고 있는데도 북부 유럽인처럼 하얀 피부 하며, 길고 부드러운 갈색 머리에 파란 눈동자까지, 게다가 머리 뒤에는 후광도 있다. 사실 우리가 지금 상상하는 예수의 이미지는 중세 회화의 영향이 큰데, 중세 회화에서 예수가 북부 유럽인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 도교가 유럽 지역에서 인정 받았기 때문이다. 빌라도는 남다른 포스의 예수와 강도 바라바를 두고 유대인들이 선택하게 했다. 유대인들이 원하는 한 명을 살려주겠다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바라바의 석방을 선택했다. 그것은 당시의 사회적 상황으로 볼 때, 어쩌면 적절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바라바는 이스라엘 민족을 통치 하는 로마에 저항해 폭동을 주도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유대인들에게 바라바는 독립 운동가였다. 유대인들에게는 정체가 불분명한 예수 보다는 현실적으로 민족을 대변하는 바라바가 더 필요해 보였을 것이다. 결국 잘 알려진 대로, 예수는 십자가 처형을 선고 받고 골고다 언덕에서 생을 마감 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여 흩어진 제자들은 모아 초기 그리스 도교의 기반을 닦게 했다. 이후 그리스 도교는 로마의 박해를 받으며, 지하 무덤이면서 동굴인 카타콤 에서 비밀스럽게 예배를 이어갔다. 하지만 로마의 박해를 받던 그리스 도교의 역사에는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박해의 대상이었던 그리스 도교를 사실상 로마의 국교로 정립했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마치 일본이 조선을 침략해서는 식민지 민족의 종교인 무속 신앙을 일본의 국교로 인정한 것 과 바를 바 없는 조치이기 때문이다. 어쨌 거나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발생한 그리스 도교는 세계적 제국인 로마의 국교다 되면서 유럽 전체로 스 영향력을 뻗어 나간다.
이렇게 그리스 도교의 영향을 이해 하는 것이 우리가 다루어야 할 중세 봉건 사회의 특성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다시 갑과 을의 사회로 돌아와 보자. 원시 공산 사회를 지나 고대 노예제 사회가 되면서 변화 되었던 가장 큰 특징은 토지와 영토라는 생산 수단이 왕에 의해서 독점 되었고 이로 인해 계급이 분화되고 정착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지배자인 왕은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신을 요청 했다. 중세 봉건제 사회가 되면서 사회적 계급은 더 다양하고 복잡하게 분화된다.
국왕과 노예 사이에 성직자, 영주, 귀족, 기사, 농노가 생긴다. 이중에 중세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계급은 영주 계급이다. 영주는 성의 주인으로서 성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에 해당하는 장원을 소유하고 있었다. 장원은 쉽게 말하면 영주의 사유지다. 고대의 토지와 비교 할 때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장원은 직접적으로 영주의 영향권 에 놓인 까닭에 장원에서 발생하는 모든 생산물은 영주의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즉 장원은 영주의 생산 수단이라 할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생산 수단을 소유하면 생산물을 소유 하게 되고, 이로써 생산 수단의 소유자는 권력을 갖게 된다. 여러 영주들이 한 명의 국왕 아래 있었지만 영주가 생산 수단을 사적으로 소유한 이상 실질적인 권력은 영주에게 속했다. 더 많은 권력을 위해서는 권력 싸움이 계속 될 수밖에 없었다. 더 많은 권력을 위해서는 서로의 영토가 필요 했고 게다가 이런 분쟁을 조율해줄 절대적 권력이 존재하지 못했다. 이렇게 영주들 간에 전쟁이 빈번해지자, 영주들은 자신의 장원을 방어하기 위해 성을 축 조 하기 시작 했다.
우리는 앞에서 생산 수단을 기준으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구분 했다. 이제는 자본주의를 더 세분화할 차례이다. 자본주의는 세 가지 세부 체제로 구분된다. 초기 자본주의, 후기 자본주의, 신 자유주의가 그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세가지 구분을 끝내면 마지막으로 공산주의에 대해서 알아볼 것 이다. 자본주의는 세 가지로 구분하는 반면 공산주의는 구분하지 않는 다고 해서 공산주의가 단일한 형태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면 않 된다. 공산주의 역시 마르크스, 레닌주의, 스탈린 주의, 트로츠키 주의 등 다양한 형태로 구분되며 오랜 시간 내부적 논쟁을 거쳤다.하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공산주의를 세부적으로 구분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마르크스의 영향력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지에 대한 논쟁과는 별개로 공산주의가 오늘날 우리에게 한 걸음 물러서 있는 것 만은 사실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공산주의 혁명을 말하는 것은 어쩐지 민망하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비교의 수단으로만 공산주의를 다룰 것 이다. 다만 간단하게 나마 비슷해 보이는 두 체제인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구분해보기는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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