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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태조 이성계 두 번째 이야기

by 나!! 강쥐 2024. 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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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 고릉

최영의 의지는 확고 했고 2차 요동 정벌군은 순조롭게 조직이 됩니다. 지원 병 포함 오만의 병력이지요. 최영 역시 정벌군에 참여 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때 우왕이 최영의 참여를 반대 합니다. 자신의 최측근인 최영이 사라지면 믿고 의지할 사람이 없어지기 때문이지요. 실제로 최영이 제주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 사이에 선왕인 공민왕이 시해된 사건도 있습니다. 우왕은 자신에게도 같은 일이 생길까 두려웠던 것 입니다. 최영은 우왕의 청을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최영 인생 최대의 실책 이지요. 최영이 없는 상황에서 고려의 정예군은 이성계와 함께 원정길에 나섭니다. 최영의 부재 속에서 군대를 이끌고 나선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발길을 멈추고 우왕에게 상소를 올립니다. 몰이 불어나 군대가 움직일 수 없으며 군량미도 떨어져 가 요동까지 가기가 어렵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성계는 회군을 요청 합니다. 그러나 우왕과 최영은 이를 거부 합니다. 대신 환관 김환을 보내 장수들에게 재물을 전해주고 출전을 독려 합니다. 이성계는 김환을 억류한 뒤 다시 한번 회군의 뜻을 독려 합니다. 이번에도 고려 조정은 이성계의 요청을 거부합니다. 결국 이성계는 장수들을 불러 모아 회군의 뜻을 전합니다. <만일 명 나라 영토를 침범함으로서 천자로 
 부터 벌을 받는다면 즉각 나라와 백성들에게 참화가 닥칠 것 이다. 내가 이치를 들어 회군를 요청하는 글을 올렸으나 주상 께서는 잘 살피지 않으시고 최영 또한 노쇠해 말을 듣지 않는다. 이제 그대들과 함께 직접 주상을 뵙고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아뢰고 측근의 악인들을 제거해 백성들을 안정 시켜야 한다. >

 



장수들이 이성계의 말에 동의 하여 회군은 시작 됩니다. 원정군은 반란군으로 변모합니다. 회군 자체는 위화도에서 결정된 일이지만 출정 전부터 이성계가 회군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최영 역시 만약의 가능성을 배 제하지는 않았기에 원정군의 가족들을 인질로 잡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지만 회군이 워낙 순식간에 이루어진 데다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가족들을 이미 대피시킨 뒤었습니다. 반란군은 어마어마한 속도로 개경으로 향합니다. 약 400키로의 거리를 불과 10일만에 주파 합니다. 오만의 병력 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속도 입니다. 때문에 최영은 개경성을 방어할 병력을 충분히 모으지 못 합니다. 혹여 있다 하더라도 대부분 왜구를 막기 위해 남쪽으로 출정한 상태 였습니다. 최영 역시 불세출의 명장인 만큼 최소한의 병력으로 개경성을 방어 했지만 병력 차이가 너무 심해 포위 당하고 맙니다. 결국 개경성은 함락 되고 최영은 반란군 앞으로 끌려 나가지요. 고려 사에는 이성계가 최영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이 일은  본의가 아닙니다. 국가가 편안하지 않고 백성이 피곤하여 원망이 하늘에 사무쳐 부득이하게 일어난 일 입니다. 부디 잘 가십시요. 라고 말했다고 기록돼 있지만 실상은 어땠을지 알 수 없습니다. 최영은 이인임의 말이 참으로 옳았구나 라고 탄식을 하지요. 최영은 귀양을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참수 됩니다. 최영은 만약 내가 평생 동안 한 번이라도 사사로운 욕심을 품었다면 내 무덤에 풀이 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실제로 최영의 묘에 풀이 나지 않아 적분 이라고 불렀다는 야사의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쿠테타는 성공했지만 이성계가 곧바로 왕위에 오른 것은 아닙니다. 우왕이 폐위 된 뒤 이성계와 위화도 회군을 함께했던 조민수란 인물이 근왕파인 이색과 손잡고 우왕의 아들인 여덟 살 창왕을 왕위에 올리며 뒤통수를 치지요. 물론 가만히 보고만 있을 이성계가 아닌지 라 우왕의 복위 시도 음모에 연루 됐다는 이유로 창왕도 폐위 시킵니다.  공양왕이 4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릅니다. 고려의 마지막 군주 입니다. 즉위 하는 날에도 울먹였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심약한 이미지가 있지만 단순히 허수아비 임금은 아니였습니다. 없는 힘이 나마 이성계에 대항하려고 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우왕과 창왕에 대한 사형 사건입니다. 원래 이성계는 사형을 미루자는 입장이었습니다. 어린 과거의 왕을 죽여 봤자 여론에 도움이 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공양왕은 이들을 신속하게 처리해버립니다. 왕들을 참옥 하게 살해했다는 여론의 비난은 모두 이성계에게로 향하게 만듭니다. 또한 이성계에게 대항할수 있는 신하들을 자기 편으로 만드는데도 주력하게 됩니다. 이색으로 대표 되는 구 주류 신하들이지요 여기에 추가로 정몽주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정몽주는 원래 위화도 회군을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공양왕을 옹립 할 때 동참했던 인물로 흥국사 9공신의 한 사람 입니다. 당연히 이성계의 측근으로 여겨졌지요. 하지만 이성계가 단순히 개혁이 아닌 스스로 왕위에 오를 야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정몽주는 공양왕과 함께 이성계를 견제하기 시작 합니다. 개혁을 하더라도 고려 왕조 내에서 이루자는 입장이었던것이지요.

 

마침 이성계가 낙마 사고로 병상에 누워있을 무렵 정몽주와 공양왕은 창왕을 옹립했던 이색을 처형하라는 이성계파 신하들의 요구를 묵살 하고 무죄 판결을 내렸으며 오히려 이성계의 오른팔인 정도전을 무고죄로 귀양을 보냅니다. 동시에 위화도 회군 이후 귀향갔던 반 이성계파 신하들도 복권을 시킵니다. 순식간에 조정이 팽팽한 균형을 이루게 됩니다. 여전히 이성계에게 강력한 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몽주가 이런 과격한 인사를 단행한 것에 의문이 생길 수 있겠습니다. 사실 이유는 간단 하지요 이성계가 맘만 먹으면 군사력을 동원해 왕조를 뒤 바꿀 수 있지만 그렇게 교체된 왕조는 정통성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 입니다. 이성계는 적어도 겉으로 나마 평화적인 왕조 교체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정몽주는 이런 이성계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들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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