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고려 공민왕 시절. 고려의 정계를 간섭하던 원나라가 점차 쇠퇴하던 시기 입니다. 민생은 도 탄 에 빠지고 각 지에서 반란이 끊이지 않았던 때이지요. 남 경 의 알 동 에서 원 나라의 관리로 자체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던 이 자 춘 은 원나라가 이런 위기 상황을 극복할 수 없을 것 이라 판단 합니다. 또한 원나라의 이민자 차별 정책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상태 지요.
마침 공민왕은 100년 넘게 지속된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지요.이를 위해서는 이 자 춘 과 같은 동북 세력의 도움이 필요 했지요. 이 자 춘 은 공민왕을 만나 쌍 성 총 관 부 를 치면 자신이 돕겠다고 약속 합니다. 그리고 이듬해 고려 군의 공격에 내 응 해 고려가 쌍 성 총 관 부 를 되찾는데 큰 공을 세우지요. 이때 이 자 춘 의 아들도 이 전투에 참전 합니다. 그가 바로 훗날 조선을 개국한 이 성 계 지요. 이 성 계를 소개 할 때 빠질 수 없는 게 그의 무 공 입니다. 특히 활 솜씨가 대단하여 신 궁 이라 불릴 정도 였지 요. 예를 들면 한번 할을 쏴서 새 다섯 마리를 잡았다 거나, 백 보 밖에 있는 배나무의 배를 떨어뜨려 손님에게 대접 했다 거나 하는 이야기가 기록 되어 있지요. 물론 이런 이야기는 대부분 조선왕조실록, 고려 사 와 같은 조선 시대에 쓰인 책에 실려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겠 습니다. 창업자의 위대함을 드높이기 위해 과장 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요. 다만 이 성 계의 활 솜씨 에 대한 이야기가 중국이나 일본의 책에도 기록되어 있는 점을 감안 한다면 아예 거짓말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만은 분명 하지요. 적어도 당대 동아시아에서 최고의 활 잡 이였 던 것 만은 분명하지요. 그의 실력을 알 수 있는 유명한 일화로 왜구의 장수 아기 발도 와 의 싸움을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고려 사 절 요 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백마를 타고 창을 휘두르며 달려와서 충돌하니 향하는 곳마다 쫓기고 쓰러져 감히 당할 자가 없었다. 우리 군사들이 아기 발도 라 고 부르면 다투어 피했다.그 사람이 얼굴까지 갑옷을 입어서 쏠만한 틈이 없었다. 태조가 말하기를 "내가 투구의 꼭지를 쏠 터이니 투구가 떨어지거든 네가 곧 쏘아라" 하고 드디어 말을 달려 나가며 쏘니 바로 투구 꼭지를 맞히었다. 투구 끈이 끊어져서 기울어지자 그자가 급히 바로 썼다. 태조가 곧 쏘아서 또 꼭지를 맞히니 투구가 드디어 떨어졌다. 두 랑 이 곧 쏘아 죽이니 그제야 적의 기운이 꺾였다. >
활 외에도 검이나 승마에도 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적 병 수 면을 단칼에 베어버리거나 적 장과 일기 토를 벌여 승리한 것과 같은 기록 역시 남아 있지요. 실제로 어 진에 보이는 덩치 역시 상당 합니다. 타고난 무 골 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렇다고 이성 계가 단순히 무 공 에 만 뛰어난 인물은 아닙니다. 전 술 를 짜는 데 있어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 백 중세의 전투를 모두 승리로 이끌었지요. 당시 동 아시아에는 위에서 언급한 왜구의 아기 발도, 북방의 나 히 추 같은 명 장 들 이 있었으나 그들은 마치 이 성 계를 위해 준비된 조연처럼 보일 정도로 이성 계 의
군 세 앞에서 허무하게 무 너 졌습니다. 이성 계는 고려 말에 치른 수 차례의 전투에서 단 한번도 패 하지 않으며 고려의 수호신으로 추 앙 받았습니다. 공민왕 사후에는 어린 우왕을 방패 삼아 전횡 을 일삼던 이인 임을 최 영 과 손을 잡고 몰아내며 권력의 핵심 부로 진입하지요. 적어도 이때 까지는 이성 계는 고려의 새로운 희망처럼 여겨졌습니다.
한편 당시는 주 원장 (홍 무제)이 세운 명 나라가 원나라를 모아내고 중국 대륙을 차지한 상황이었습니다. 명 나라는 고려와 원나라가 손을 잡는 것을 경계 했지요. 그래서 회 유 와 협박을 통해 고려를 길들이고자 했습니다. 이미 공민왕 시절 명 나라에 사대의 예를 표했지만 명 나라는 이후로도 과도한 조공을 요구하며 고려를 압박했습니다. 심지어 철 령 이북의 땅, 곧 쌍 성 총관 부가 있던 지역이 옛 원나라의 땅이므로 자신들이 접수할 것을 통보하기에 이르지요. 결국 권력의 정점에 서 있던 최 영 이 폭발 합니다. 명 나라가 요구 한 것은 고려 땅의 일부지만 이런 식으로 다 갖다 바친다면 언젠 가는 나라를 통 채로 바쳐 야할 것이란 주장을 폈지요. 최 영 은 우왕에게 요동 정벌을 요구하고 우왕 역시 그의 요구를 받아 들입니다.
그런데 이성 계가 최영의 요동 정벌을 반대 합니다. 사실 이성 계는 이미 공민왕 시절 요동 성을 정벌한 경력이 있습니다. 어처구니 없게도 실수로 군량을 다 태워 먹으며 퇴각해야 했지만 은 요. 또한 이성 계는 최영 이 가장 신뢰하는 후배였지요 이런 상황에서 이성 계가 최영의 요구를 거부한 것은 이상 합니다. 이성 계는 요동을 칠 수 없는 네 가지 이유 죽, 4 불 가 론을 내세워 요동 정벌을 반대 하지요.
<지금에 출 사 하는 일은 네 가지의 옳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에 거역하는 것이 한 가지 옳지 못함이요, 여름철에 군대를 동원하는 것이 두 번째 옳지 못 함이요, 온 나라 군사들을 동원하여 멀리 정벌하면 왜적이 그 허술한 틈을 탈 것이니 이것이 세 번째 옳지 못함이요 지금 한창 장마철이므로 활은 아교가 풀어지고 많은 군사들은 역 병을 앓을 것이니 이것이 네 가지 옳지 못 함이 니라>
이 대답은 이성 계 본인의 생각 이 라기 보다는 이성 계와 친분이 있던 정도전과 같은 신진 사대부의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이성 계가 요동 정벌을 완전히 반대한 것은 아니어서 군사를 일으킨다면 군량이 풍족한 가을이 좋을 것이라 조언 하지요.
사실 소국이 대국을 칠 수 없다는 첫 번째 발언을 제외하면 다른 세 가지 의견은 전략적으로 지극히 타당한 이야기 입니다. 무엇보다 이성 계는 직접 요동 성을 점령하고 군량 문제로 퇴각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는 경험에 빗대어 요동 정벌이 승산이 없는 싸움임을 주장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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